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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왕조 한명회

by 타페자라 2021. 11. 21.

한명회


1415 ~ 1487

칠삭둥이로 어려서는 사지가 온전치 못하였으나 성장하면서 체구가
보통사람보다 커지고 지모가 뛰어났다

젊어서 여러번 과거를 보았지만 낙방만 하였고 38세에 음보로 경복궁직을 얻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책사와 장정들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친구인 권람을 통해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하고 그 이후에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고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한명회가 중심이 되어 세조 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견제하게 된다.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 사육신사건 후에 좌익공신, 남이의 옥사 처리 후에 익대공신,
성종즉위 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 권람, 신숙주 등도 공신이 되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을 훈구세력이라 한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는데 신숙주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반역을 모의하면서 신숙주와 한명회등과 글로 통했다는 자백을
하였다 이때 한명회는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자신의 결백과 세조의 정치적주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사직했다가 곧 정계에 복귀하였다

1467년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 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지었는데
워낙에 풍광이 좋은곳이여서 중국의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보고 갔었는데
1481년에도 압구정 관람을 청하였는데
좁다는 이유로 잔치를 열수 없다하면서
이때부터 성종과 부딧혔다 이런일이 몇번
일어나니 성종이 진노하엿고 이로 인해
한명회는 압구정정자 때뭄에 그의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후에 그가 죽고나서 연산군때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조사하면서 한명회에게도 벌이
내려졌는데 한명회는 이미 죽었있었음에도
묘지를 파헤쳐 시체의 목늘 친 사건이 있었다

생전에는 권력과 부귀영화를 가졌었고
죽었을때에는 끝이 좋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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