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조선왕조 사림파와 훈구파

by 타페자라 2021. 12. 4.

*사림파

고려말 신진 사대부중 고려왕조를 제도적으로 개혁하자는 온건파로

정몽주 길재 등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

16세기 성종이 김종직 등 사림파를 중앙 관직으로 진출시키기 

시작하는데  이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훈구파와 대립을 하면서 이로 인해 사화가 발생하는데 무오사화

기묘사화 등으로 사림파가 화를 입으면서 세력이 약해진 사림파는

지방으로 내려가 은둔 생활을 하면서 서원향약 유향소를 기반으로 

세력을 다시 확장하게 되는데 선조 때 다시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면서 

권력을 잡게 되면서 사림들끼기 학문적 입장 차이와 이조 전랑 자리를 

놓고 대립하다 동인 서인으로 나뉘었다가 또다시 북인 남인 노론

소론 등으로 나뉘게 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사림은 조선 건국당시 역성혁명에 불참하였고 

기자조선을 중히 여기는 사대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과학 기술을 천시하면서 사람이 집권 시에는 과학기술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

위정척사를 강조하면서 성리학 이외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사림은 지방자치를 꿈꾸었고 경학을 중시하였다 

 

 

*훈구파

고려말 신진사대부중 고려왕조를 버리고 역성혁명하자는 급진파이며

정도전 조준등이 있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개국공신들이 훈구파에 속하였다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공을 새워 정치권을 장악한 정치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관학파라고도 한다. 

 

건국과정에서 조선초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실용적 학문을 하였고 편찬사업을 열어 수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훈구파는 사람파가 등장하기 전까지 나라로부터 공신전과 과전을 부여받고

대토지를 소유하고 경젝적으로 부유하였으며 중앙 관직의 요직을 독점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작은토지를 소유하던 사람과의 대립이 되었고 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강조하는 성리학 정신을 내세워 훈구파와의 대립이 심하였다. 

 

성종이 사람을 등용시키면서 훈구파는 사림파와 갈등을 초래하였다. 

사화로 인해 지방으로 쫓겨났던 사림파는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중앙 관직에 다시 올라오면서 훈구파는 몰락을 하게 되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