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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조선왕조 조광조와 기묘사화

by 타페자라 2022. 2. 26.

조광조

 

 

 

 

성종 13년에 조원강과 여흥 민씨 사이에 태어났다 

조원강은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이였고, 압록강 인근 평안북도 희천의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유학자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 오자 17세였던 조광조는 김굉필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 

 

중종 5년 29세에 진사시를 장원을 하였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자신의 행동도 철저히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르려 하였다. 

 

1510년 중종 5년 29세에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

알성시- 비정규 시험인 별시로 국왕이 성균관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을 선발

 

식년시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

 

초시에 합격하는 경우 성균관 입학 자격 부여

 

1515년 알성시에서 중종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책문을 냄. 

=>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조광조=> 유교적 이상 정치, 도덕정치의 실현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를 삼으십시오

 

책문은 질문 대책문 또는 대책 = 책문에 답함

 

1515년 중종 10년 알성시에서 2등으로 급제

중종 연산군 시대의 문제를 청산하고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며

왕권의 지지 기반이 되기를 원하였다.

조광조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중종이 이뤄주기를 바라였다.

이후 중종과 조광조는 정치적 파트너가 되었다.

 

조광조와 사림파의 개혁정치 

~유교적 왕도정치 도덕정치

~토지소유 상한선 설정

~소격서 폐지

~공물 폐단 시정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이루어지려면 언론의 위상이 강화돼야 한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사림파가 포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조선 언론 삼사

사헌부 - 왕의 언행을 바로잡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사 처벌

사간원 - 국왕에 대한 간쟁과 논박

홍문관 - 왕실의 책이나 문서를 관리하고 정책을 연구해 임금의 정치에 도움을 준 관청

 

성리학 이념 지침서 소학 향약을 보급

향약 사림파의 정치이념을 지방에 구체적으로 실천한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4가지 덕목

*덕업상권- 덕업은 서로 권하고

*과실상규 -과실은 서로 타이르며

*환난상휼 - 재앙과 어려운 일은 서로 구휼한다

향약을 운영하는 책임자는 사림파

 

조광조가 개혁 정치를 이루려면 자신을 도와주는 정치 세력이 필요한데 

관직에 진출해있는 조광조의 정치 세력이 거의 없다

 

기존의 과거 시험 체제에서는 훈구파가 유리 훈구세력은 과거 시험 준비를 집중적으로 계속해왔기 때문

과거 시험으로는 주로 훈구세력이 관직에 진출하였다.

 

현량과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해 대책만으로 시험한 제도 

            (대책-임금의 물음에 대답하여 쓴 글)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선발한다 해놓고 실질적으로는 조광조와 개혁정치를 함께할 수 있는 

세력을 주로 선발함

 

위훈삭제 - 공신이 되면 공신호와 함께 토지와 노비 등 각정 경제적 특혜를 주었는데 

120명 이상의 공신들에게 지급되는 토지와 노비는 국자 재정에 부담이 되기 시작하였다.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얻은 뒤 사간원의 정언을 거쳐 대사헌을 맡으면서 개혁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반정공신의 2/3가 거짓된 공훈- 위훈삭제를 거론한다.

 

조광조 세력은 위훈삭제를 통해 훈구파의 권력세습을 막으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공신들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어려웠던 중종은 반정공신 3인방이 사망하자 새로운 

정치 파트너 조광조를 등용해 개혁 정치를 펼쳤다.

 

공신 3인방-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조광조가 적극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초반에는 호흡이 잘 맞는 정치 파트너였다면 

조광조의 개혁정치가 강력하게 전개될수록 조광조와 중종은 위험한 동행을 이어갔다.

 

조광조가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수록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의심을 가짐

 

사람파를 등용해 왕권과 신권의 균형을 맞추려 했던 중종

 

조광조의 세력이 커지면서 신권이 너무 강해짐

조광조의 왕권 견제론에 제동을 걸기 시작함

중종은 왕권강화를 생각하고

조광조는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결실을 맺으려면 왕권보다 신권이 강해야 한다 생각

경연을 통해 왕도정치와 도덕정치를 펼치셔야 한다

 

1519년 중종 14년 11월 15일 밤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사림파가 숙청된 기묘사화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가 본격화되면서 훈구파들 결집하게 된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이 두터워 개혁정책을 막을 수 없었던 훈구파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정책이 훈구파에게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중종이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챈 훈구파

잦은 경연과 지진 발생의 원인도 중종의 탓으로 돌렸던 조광조 세력

 

홍경주 남곤 심정 경빈 박 씨 등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조광조의 부정적 여론 형성함

훈구세력이 중종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면서 중종에게 끊임없이 조광조 모함

 

주초위왕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잇는데 주와 초를 합하면 조가 된다

조 씨가 왕이 된다

중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중종이 느낀 부담감 

끊임없는 수기를 통해 왕 스스로 성인이 될 것을 요구하고 왕권 제약 

 

조광조 중심 사림파 세력의 급진적 이상 정치와 개혁정책에 염증

 

중종도 처음에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력의 학문적 능력 개혁적 성향을 수용하려 했으나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급진적으로 느껴지면서 조광조에게 실망

이때에 홍경주 남곤 심정 등 훈구파가 중종에게 조광조를 끊임없이 모함하자 

하루 전까지만 해도 조광조를 격려했던 중종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짐

 

1519년 11월 15일 밤 중종은 자신의 측근 세력을 궁궐로 부른다

 

경복궁의 동쪽 건춘문 서쪽 영추문 남쪽 광화문 북쪽 신무문

건춘문, 영추문, 광화문은 밤이 되면 궁궐 문이 모두 잠기게 되어 쉽게 들어올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북쪽의 신무문은 승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문이라서  왕이 밀지를 내려 신무문을 통해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를 궁궐로 불러 조광조를 체포령을 내린다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자신의 의중을 신하들에게 먼저 내비쳤다는 대목도 나온다.

 

조광조는 붕당을 만들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됨

 

처음에는 중종이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명령했으나

영의정 정괄필의 만류로 결국 조광조를 유배 보냄

전라도 능주로 유배

중종이 조광조로 인해 왕권에 위협을 느낄 때면

훈구파는 조광조를 처형해야 화근을 없앨 수 있다 하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38세에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다

 

~조광조가 죽음을 앞두고 지은 절명시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마지막까지 중종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던 조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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